
남편이 대학시절 어학연수를 다녀온 곳이라 저는 밴쿠버를 실제로 가보기도 전에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습니다. 밥 먹다가도 "거기 바다 앞에서 먹던 게 진짜였는데", 겨울에 스키장에 스노보드 타러 가면 "로키산맥에서 탈 때가 최고였지" 같은 말이 수도 없이 나왔거든요. 그러다 보니 캐나다에 살았던 지인들조차도 극찬을 쏟아내는 이 도시에 대해 어느 순간부터 저도 모르게 기대치가 꽤 높아져 있었습니다.
밴쿠버 다운타운: 도시 설계가 말해주는 것들
솔직히 자료를 찾아보면서도 이렇게까지 잘 설계된 도시일 줄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2025년 EIU 세계 삶의 질 지수(Economist Intelligence Unit의 Global Liveability Index)에서 173개 도시 중 북미에서 유일하게 Top 10에 오른 도시가 밴쿠버입니다. 여기서 EIU 삶의 질 지수란 안정성, 의료 수준, 문화 환경, 교육, 인프라 다섯 가지 항목을 종합 평가하는 지표로, 단순한 관광 도시 순위가 아닌 실제 거주 적합성을 따지는 기준입니다(출처: Economist Intelligence Unit).
다운타운을 걷다 보면 이 점수가 왜 나왔는지 몸으로 느껴집니다. 자전거 전용 도로인 사이클 트랙(Cycle Track)이 도심 곳곳에 촘촘하게 깔려 있고, 킥보드나 자전거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차량과 완전히 분리된 구간을 달립니다. 사이클 트랙이란 차도에서 물리적으로 분리된 자전거 전용 노면을 뜻하는데, 단순히 흰 선으로만 구분하는 방식과 달리 연석이나 화분 등으로 경계를 명확히 해둔 구조입니다. 이 덕분에 킥보드를 타고 잉글리시 베이에서 캐나다 플레이스까지 이동하는 것이 실제로 매우 수월했다고 합니다. 제가 직접 달린 건 아니지만, 자료를 보면서 "여기는 진짜 사람이 먼저인 도시구나" 싶었습니다.
잉글리시 베이(English Bay)는 1792년 영국 탐험가 조지 밴쿠버가 처음 이 땅에 닿았던 해변입니다. 해변 이름 자체가 그 역사를 담고 있는 셈인데, 지금은 일몰 명소이자 매년 세계 3대 불꽃놀이 축제 중 하나로 꼽히는 혼다 셀러브레이션 오브 라이트(Honda Celebration of Light)가 열리는 장소로 더 유명합니다. 해변 옆으로는 어메이징 래프터(Amazing Laughter)라는 조각 작품군이 설치되어 있는데, 중국 현대 미술가가 자신의 얼굴을 형상화한 웃고 있는 남성 14인을 각기 다른 자세로 배치한 작품입니다. 원래 임시 전시였지만 반응이 너무 좋아 영구 설치물이 된 경우입니다.
가스타운(Gastown)은 밴쿠버라는 도시가 시작된 역사 지구입니다. 1867년 선술집을 연 존 데이튼이라는 인물의 별명 '개시(Gassy, 수다스럽다는 뜻)'에서 지명이 유래했습니다. 이곳에 있는 증기 시계(Steam Clock)는 1977년에 제작된 세계 최초의 대중 공간 설치 작동형 증기 시계인데, 사실 이 시계가 만들어진 배경이 꽤 현실적입니다. 당시 가스타운 지하에 난방용 스팀 파이프라인이 깔려 있었는데, 노숙자들이 그 위에서 잠을 자는 문제가 생겼고, 도시 측에서 파이프 위에 아예 시계를 얹어버린 것입니다. 노숙 방지가 목적이었던 구조물이 지금은 밴쿠버 최고의 포토 스폿이 되었다는 점이 묘하게 흥미롭습니다.
밴쿠버 다운타운에서 놓치기 아쉬운 곳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잉글리시 베이: 일몰 명소, 어메이징 래프터 조각 설치, 이누쿠슉(Inukshuk) 석상
- 캐나다 플레이스: 1986년 세계 박람회 엑스포 전시관에서 출발한 랜드마크, 흰 돛 모양 지붕이 특징
- 가스타운 증기 시계: 15분마다 증기 분출, 증기와 전기 혼용 방식으로 작동
- 랍슨 스트리트(Robson Street): 밴쿠버에서 가장 번화한 쇼핑 거리
- 밴쿠버 공공도서관: 마리나 베이 샌즈를 설계한 모세 사프디가 건축, 로마 원형극장에서 영감을 받은 구조
스탠리파크와 그랜빌 아일랜드: 자연과 생활이 공존하는 방식
스탠리파크(Stanley Park)는 뉴욕 센트럴파크보다 넓은, 완전히 인공 조성이 아닌 원래 있던 숲을 그대로 공원화한 곳입니다. 100년 넘게 자란 전나무와 삼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공원 내부에서 사슴과 너구리가 자유롭게 돌아다닙니다. 제가 자료를 찾아보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건 시월(Seawall)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시월이란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보행자 및 자전거 전용 산책로를 뜻하는데, 스탠리파크의 시월은 총 28km로 세계에서 가장 긴 연속 해안 산책로입니다(출처: Vancouver Park Board). 공원 안에서 바다를 보면서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할 수 있는 구조 자체가 이 도시의 생활 철학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원 내 브록턴 포인트(Brockton Point)에는 1915년에 세워진 등대가 있고, 그 옆으로는 나인 오클락 건(9 O'Clock Gun)이라 불리는 1819년 제작 대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항구도시였던 특성상, 시계가 없던 시절 입항하는 선원들에게 정확히 밤 9시임을 알리기 위해 대포를 쏘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매일 밤 9시에 대포 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원 한쪽에는 브리티시 컬럼비아(BC) 원주민들의 토템폴(Totem Pole)이 여러 기 세워져 있습니다. 토템폴이란 가문의 역사나 전설을 나무 기둥에 새겨 표현한 원주민 문화의 상징물로, 알래스카와 BC주에 걸쳐 내려온 전통입니다. 그중에서도 BC주 원주민들의 토템폴이 역사가 가장 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랜빌 아일랜드(Granville Island)는 이름은 섬이지만 사실 1915년에 양옆으로 수로를 파서 인위적으로 고립시킨 반도에 가까운 공간입니다. 산업지구로 사용하다가 쇠퇴 후 예술 지구로 리브랜딩(Rebranding)한 곳인데, 리브랜딩이란 기존의 이미지나 기능을 완전히 새롭게 재정의하는 전략을 뜻합니다. 지금은 150여 개 상점이 들어선 퍼블릭 마켓(Public Market)을 중심으로 로컬 농산물, 수제 빵, 수공예품을 파는 거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1900년대 초 철강 공장 시절의 철골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천장 아래서 로컬 시장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여기서 제 솔직한 생각을 하나 보태자면, 밴쿠버는 한 달 살기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도시입니다. 자연이 워낙 압도적이고, 교통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차 없이도 생활이 가능하다는 게 큰 장점입니다. 다만 현실적인 문제는 물가입니다. 외식 물가가 비싸 자취식 생활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고, 한 달 숙박비만 300만 원 안팎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안 든다"는 말이 저는 가장 와닿았습니다. 다문화 국가답게 어디서 왔든 그냥 녹아드는 분위기, 그게 밴쿠버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밴쿠버는 "보러 가는" 도시가 아니라 "살아보고 싶은" 도시입니다. 저는 아직 스노보드를 메고 로키산맥 슬로프에 올라서는 그날을 상상 중이지만, 언젠가 가족과 함께 실제로 그 눈 위에 서는 날이 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밴쿠버를 계획 중이라면 다운타운 도보 또는 킥보드 탐방에 하루, 스탠리파크 시월 라이딩에 반나절, 그랜빌 아일랜드 퍼블릭 마켓에 오전 시간을 배정하는 것을 권합니다. 어디 하나 건성으로 지나치기 아까운 곳들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Hz43CvPBX-8
https://www.youtube.com/watch?v=SO06AIe33w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