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현존하는 유일한 5층 목탑이 속리산 자락에 서 있습니다. 천년 고찰 법주사 이야기입니다. 제가 자란 충북에선 법주사가 가장 큰 문화재 및 관광지였으며, 학생들에게 체력단련으로 등산까지 할 수 있는 천혜의 소풍 장소였습니다.
제일 만만하게 다녀갈 수 있는 곳이라 어렸을때는 멀리 못가는 휴일에 자주 다녀왔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면서는 속리산 공원안에 캠핑장이 있어 캠핑겸 법주사에서 '부처님 오신 날'까지 보낸적도 있었습니다. 아직 속리산 법주사를 못 가보신 분이 계시다면 이 글이 많은 도움이 되셨을면 좋겠습니다.
법주사 가는 길, 정이품송부터 시작됩니다
법주사로 향하는 길목에 천연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바로 정이품송입니다. 수령이 약 6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14.5m에 가슴높이 둘레만 4.7m에 이릅니다.
정이품송이라는 이름에는 재미있는 유래가 있습니다. 조선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할 때 가지가 낮게 드리워져 있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들어올렸다는 설화가 전해집니다. 이에 세조가 정이품이라는 관직을 내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정이품이란 조선시대 관직 체계에서 상당히 높은 품계로, 오늘날로 치면 장관급에 해당하는 위치입니다.
1993년 강풍으로 서쪽 큰 가지가 부러지는 수난을 겪었음에도 600년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소나무 앞에 서면, 법주사 여정이 이미 시작된 느낌입니다. 제가 직접 그 앞에 서봤는데, 거대한 수관이 하늘을 덮는 모습이 단순한 나무 한 그루 이상의 존재감을 풍기고 있었습니다.
속리산 입구부터 법주사까지 이어지는 세조길도 놓치면 아깝습니다. 2016년 9월 개통된 이 숲길은 국가 숲길로 지정된 속리산 둘레길의 일부로, 전 구간 약 2.4km가 무장애 탐방로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무장애 탐방로란 경사와 단차를 최소화해 휠체어나 유모차를 이용하는 분들도 불편 없이 걸을 수 있도록 설계된 보행로를 말합니다. 덕분에 어르신이나 아이들과 함께 와도 체력 걱정 없이 천천히 걸을 수 있는 코스입니다.
팔상전, 목탑인가 전각인가
법주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압도하는 건 국보 제55호 팔상전입니다. 국내 현존하는 유일한 5층 목탑으로, 우리나라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높은 건물에 속합니다.
팔상전은 6세기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된 법주사의 역사와 함께해 왔지만,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624년 벽암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습니다. 이후 또 한 차례 화재로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복원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학계에서 이 건물을 두고 오랜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전각이냐 탑이냐의 문제였는데, 1968년 해체 복원 과정에서 심초석, 즉 탑의 중심 기둥을 받치는 초석 아래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면서 탑의 기능도 함께 수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사리장엄구란 부처의 사리를 담아 봉안하기 위해 제작된 용기와 공양물 일체를 뜻합니다. 1605년 사명대사 유정이 법주사를 중창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팔상전이라는 이름은 내부에 그려진 팔상탱화에서 비롯됩니다. 팔상탱화란 부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불화를 말합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민중들에게도 부처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그림으로 교리를 풀어낸 방식으로, 당시 불교가 민중 속으로 어떻게 파고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사적 자료입니다. 제가 직접 안으로 들어가 탱화 앞에 섰을 때,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지는 감각은 지금도 선합니다.
미륵 신앙의 땅, 법주사가 품은 역사
법주사는 처음부터 미륵 신앙의 중심 도량으로 창건되었습니다. 미륵 신앙이란 미래에 나타날 부처인 미륵불을 믿고 수행하면 누구든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핵심으로 하는 불교 신앙 체계입니다.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이 메시지는 신라 시대 민중들에게 상당한 희망이었을 겁니다.
법주사의 가람 배치, 즉 사찰 건물들의 배치 구조를 보면 이 신앙의 흔적이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가람 배치란 사찰 내 전각, 탑, 문 등 건물들의 공간적 구성 방식을 뜻합니다. 법주사가 자리 잡은 지형은 배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팔상전은 그 배의 돛대 역할을 한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법의 배가 중생을 이끌어 부처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돕는다는 상징적 의미입니다.
동양 최대 규모의 금동 미륵 대불도 법주사의 상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불상과 팔상전을 함께 보면 당시 신라 불교 문화가 얼마나 장대한 규모로 민심을 움직이려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편 보은 지역의 지리적 중요성은 사적 제235호인 삼년산성에서도 확인됩니다. 신라가 백제와의 국경 지역인 이곳에 삼년산성을 쌓아 삼국 통일의 발판을 마련했고, 법주사는 튼튼한 성벽과 함께 민심을 다독이는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법주사가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명칭으로 등재된 것은 이러한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결과입니다(출처: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인도에서 비롯된 불교의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적 요소를 받아들이고, 독자적인 한국 불교의 다양성을 종합적으로 담아냈다는 점이 등재 이유였습니다.
법주사에서 제대로 쉬고 오는 법
법주사를 처음 방문한다면 아래 순서로 동선을 잡으시면 좋습니다.
- 정이품송 감상 후 세조길 입구 진입
- 약 2.4km 세조길을 따라 계곡과 저수지 풍경 감상
- 법주사 경내 진입, 팔상전·금동 미륵 대불 관람
- 성보 박물관에서 법주사 소장 문화재 확인
- 경내 냇가 또는 세족 공간에서 잠깐 휴식
법주사 내부에도 보행 약자를 위한 이동 통로가 마련되어 있어서 어르신이나 유아차를 동반한 가족도 무리 없이 관람할 수 있습니다. 법주사 성보 박물관에서는 팔상전과 관련된 사리장엄구를 비롯해 오랜 역사가 쌓인 유물들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스님들의 법공양 모습도 운이 좋으면 마주칠 수 있는데, 그 장면이 눈에 오래 남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목탁 소리와 독경 소리가 산바람과 섞이는 그 순간만큼은 일상의 소음이 잠깐 사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법주사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 냇가에 잠깐 앉아 발을 담그며 가족들과 쉬어가는 것도 여행의 좋은 마무리가 됩니다.
속리산 국립공원 방문객 현황에 따르면 이 지역은 연간 수십만 명이 찾는 대표적인 사계절 명소입니다(출처: 국립공원공단). 속리산 버스 터미널이 있어 대중교통으로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입니다.
법주사는 단순히 오래된 절을 구경하는 여행지가 아닙니다. 팔상전 안에서 부처의 생애를 그림으로 마주하고, 사리장엄구가 발굴된 자리의 무게를 느끼고, 세조길을 걸으며 피톤치드를 마시다 보면 어느새 몸과 마음이 조금 가벼워져 있습니다. 이번 여름이 오기 전에 한 번 다녀오시길 권해드립니다. 천 년 된 공간이 건네는 안식은 생각보다 오래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