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어렸을때까지만 해도 국내 여행이 해외보다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편견을 바꿔준 것이 책 한 권이었습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들고 전 남자친구, 지금의 남편과 함께 남도로 떠났던 그 여행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낡은 지도와 책 한 권만 들고 다산초당과 영랑생가, 무위사를 돌았던 그 하루가 지금껏 해온 어떤 여행보다 깊이 남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국내 여행의 한계, 실제로는 달랐습니다
국내 여행은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경주 가면 불국사, 제주 가면 바닷가, 안동 가면 하회마을 정도로 끝난다는 인식이죠. 저도 한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문화유산 답사, 즉 단순 관광이 아니라 유적지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며 걷는 방식으로 여행하면 국내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됩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1993년 5월 초판이 출간된 이후 현재까지 시리즈 합산 500만 부 이상이 판매된 기록적인 인문 여행서입니다. 여기서 인문 여행이란 단순히 명소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의 역사·미학·인물의 서사를 함께 읽어내는 여행 방식을 말합니다. 이 방식으로 접근하면 강진 해남 일대 남도 답사 코스 하나만으로도 유럽 일주와 견줄 감동이 나온다는 게 저는 이제 진심으로 납득됩니다.
문화유산청이 관리하는 국가지정문화재 현황을 보면, 국보·보물·사적을 합산한 국가지정문화재가 2024년 기준 4,600건을 넘습니다(출처: 문화재청). 이 숫자가 의미하는 건 한국이 얼마나 촘촘하게 유산이 깔려 있는 나라인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중 스무 곳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해외 패키지를 예약합니다.
일반적으로 해외 7박 8일이 국내 2박 3일보다 풍부한 경험을 준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는 이게 여행 방식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내도 5박 6일 일정을 짜면 체감 밀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최소 2박 3일은 돼야 한다는 점도 경험으로 확인했습니다. 두 번째 날은 전날의 인상이 충분히 소화된 상태로 같은 유적지를 다시 보기 때문에, 감동의 깊이 자체가 다릅니다.
답사 코스를 설계할 때 참고할 만한 핵심 권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 남도권: 강진 다산초당 → 영랑생가 → 무위사 → 해남 대흥사 → 고산 윤선도 유적 → 땅끝
- 경주권: 대릉원(신라 고분군) → 첨성대 → 안압지(동궁과 월지) → 국립경주박물관 → 경주 남산 보리사 → 감은사지 → 대왕암
- 안동권: 하회마을 충효당 → 병산서원 → 도산서원 → 농암종댁 → 청량산
- 남한강권: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 → 거돈사지 → 신륵사
저는 이 중 안동권을 가장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의성김씨 큰종댁인 청계종댁은 일반적으로 도산서원과 묶어서 보는 코스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청계종댁은 안동댐, 임청각, 김동삼 선생의 협동학교 유적과 함께 보는 것이 거리상으로도, 역사적 맥락으로도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하회 충효당과 묶이는 코스보다 이쪽이 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더 촘촘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청계종댁은 하회 충효당보다 건립 연대가 오래된 고가로, 한옥의 배치 구조인 좌향(건물이 자리 잡는 방향과 지형의 관계)을 이해하며 보면 그 구조가 감탄스럽습니다. 여기서 좌향이란 산세와 물의 흐름을 고려해 건물의 방향과 공간 구성을 결정하는 전통 건축 원리를 말합니다. 단순히 "오래된 집"이 아니라, 지형을 읽고 사람의 삶을 설계한 건물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제주 오름과 폐사지, 직접 가봐야 알 수 있는 것들
제주 여행은 렌터카 번호판 허(許)자에서 따온 말로 '제주 허씨 여행'이라는 표현이 있을 만큼, 렌터카로 자유롭게 다니는 여행 방식이 일반화돼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제주에서 바닷가와 카페 중심으로 일정을 짭니다. 저도 처음 제주를 갔을 때 그랬습니다.
그 후 제주에서 2년여를 살수 있는 기회가 있어 시간이 날때마다 오름을 다녀봤습니다. 막내가 태어난지 1년이 조금 넘었을때라 조금은 쉬운 오름들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오름들을 만만하게 보시면 안됩니다.
그 중 다랑쉬오름과 용눈이오름을 처음 올랐을 때의 감동은 이루말할 수 없었습니다.. 다랑쉬오름은 정상까지 약 25~30분을 쉬지 않고 올라야 합니다. 정상에 올라서면 분석구(噴石丘), 즉 화산 분출로 형성된 원형 분화구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여기서 분석구란 용암이 아닌 화산 분출물이 쌓여 만들어진 원뿔형 지형을 말하며, 제주의 오름 360여 개가 모두 이 방식으로 형성된 기생화산입니다. 그 공간에 서 있으면 바람의 세기 자체가 다릅니다. 사진으로는 절대 전달이 안 됩니다.
용눈이오름은 현재 식생 보호를 위해 출입이 제한되는 시기가 있으므로 방문 전 반드시 제주특별자치도 공식 채널에서 개방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출처: 제주특별자치도). 이 오름이 특별한 이유는 세 개의 분화구가 겹쳐서 형성된 능선 곡선입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살아있는 생물의 등선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데, 그 선이 인공으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형태입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인 추천으로 서귀포의 군산오름을 추천드립니다. 자동차가 중간까지 오를 수 있어 걷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바위로 이뤄진 오름이라 조금은 조심하면서 올라야 합니다. 오른후에 보이는 서귀포 푸른 바다와 또 다른 한쪽은 한라산을 바라보면 그 또한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경주권과 남한강권의 폐사지(廢寺址), 즉 절이 사라지고 터만 남은 유적지는 국내 여행에서 가장 덜 알려진 장소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폐사지란 불교 사찰이 폐허가 된 이후 탑, 석등, 부도 등 석조 유물만 남아 있는 유적 터를 의미합니다. 원주 거돈사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절터인데, 승탑(고승의 사리를 모신 탑)과 돌거북 비석, 800년 된 느티나무가 아무 설명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도시에서 보는 유물과 달리, 자연 속에 그대로 놓인 유물은 공기부터 다릅니다. 직접 제 눈에 담았을때의 그 정적이 생각보다 훨씬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유홍준 교수의 조언 중 하나가 "자신이 알고 싶은 걸 쓰는 게 아니라, 상대에게 알려주고 싶은 걸 쓰는 것"이라는 말이었는데, 그 원칙이 답사기 전체에 흐르고 있다는 걸 다시 읽으면서 느꼈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국내 여행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빠르게 많이 보는 것보다 하룻밤을 그 자리에서 묵고 다음 날 다시 보는 것이 실제로 더 많이 남는다는 걸 몸으로 확인했습니다. 올겨울 안동 서원들을 다시 돌아볼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처음 가시는 분이라면 남도 답사 코스부터 시작하시길 권합니다. 강진 해남 땅끝까지 이어지는 그 길은, 25년 전 제가 그랬던 것처럼 기대 이상의 감동을 돌려줄 겁니다.